파조 소개
“ 정헌대부(正憲大夫) 이조판서(吏曹判書) 신묵재공(愼默齋公)
제단(祭壇) 비명(碑銘) ”
제단(祭壇) 비명(碑銘) ”
이조판서 신묵재 김공의 휘는 불비(不比)시니 가락국 시조대왕의 후손이라.
공이 일찍이 괴이한 재질이 있어서 봉상대부 전리총랑으로부터 보문각 직제학과 지제교선과 서해안렴사와 성균죄주겸 의랑을 지내시고 등급을 뛰어 넘어서 이조판서에 이르렀다.
일찍이 포은 정몽주 선생을 사사하여 성리학을 들으시고 드디어 재상의 지위에 이르러 지치를 도와서 성취하게 한즉, 마땅히 문장과사업이 청사에 혁요함이 있었으나 여러번 호검을 지나서 문헌이 탕잔하여 생졸과 배위를 모두 고증할 수 없고, 또 묘소가 김해 거절리에 있다 하나 알 수 없으니 후손 등이 심히 개탄하여 차원군 동면 금호재의 옆에 설단(設壇)하고 비를 세워 장차 세일제를 행사니 대개 공의 자와 손과 증손의 누세 분영이 모두 금동의 산록에 있고 재실도 제숙의 곳이라. 이 단을 이 곳에 설치한 것은 실로 정으로 화합한 것이라.
20세 후손 정환이 나에게 와서 말씀하기를 이 일은 실로 우리 증왕고 휘 종내공이 일생을 경영하였다. 끝내 이루지 못한 것이라. 지금은 종론이 함께 하여 마침 성사가 되니 일가분들의 뜻에 따라 원하는 것이 마치게 되었고, 또 증왕고의 하늘에 계신 혼령도 위로될 것이다. 우리 문장께서 서문으로 후손에게 전하기를 청하였느니라. 이 역사에 큰 돈을 낸 분은 후손 노징이요, 시종 간사를 맡은 분은 동섭과 동설이라. 공의 후를 안찰하건대 사(四)자가 있으니 장자는 수광이니 호는 환성헌이라 문과로 수원부사를 역임하시며, 직간과 염백으로 저명하고 예문관(藝文館) 춘추관(春秋館)으로 양사(兩司) 헌납(獻納)에 이르고 후에 특별히 한림원 태학사를 내려도 나아가지 않으시고 창원의 산남에 사시었다. 숙광은 정언이요, 계광은 목사요, 익광은 군수이시었다.
수광의 남석공은 진원현감이요, 석근은 참봉이고, 숙광으 남 석하는 진사요, 계광의 남 석징은 봉사요, 익광의 남은 석형이요. 석보는 감무요, 석현은 현감이라. 이후로는 자손이 번성하여 가히 헤어리지 못하노라. 명하여 말하기를 신성의 후예가 그 화려함이 불억이라. 근원이 멀고 흐름이 길어 팔(八)역에 편만하네. 거룩하도다.
판서공은 시대에 맞게 나셨도다. 몸을 조정에 두어 문장의 큰 복이라. 연원이 있으니 늙은이의 스승이라, 아깝도다. 거룩한 자취가 탕잔하여 남음이 없어라. 하물며 엄한 위엄은 눈으로 볼 수 없도다.
우모하는 곳이 없어 후손에게 한을 주었음이라. 지금에야 설단(設壇)을 생각하며 비(碑)를 세웠구나. 일기가 유통하여 신이 거기에 임하리라. 해마다 제수를 올려 예로서 의를 일으김이라.
삼가 제사를 끝없이 하여 그 천년을 이으리라.
무신(戊申) 입춘절(立春節)
종후생(宗後生) 종하(鍾河) 찬(撰)
공이 일찍이 괴이한 재질이 있어서 봉상대부 전리총랑으로부터 보문각 직제학과 지제교선과 서해안렴사와 성균죄주겸 의랑을 지내시고 등급을 뛰어 넘어서 이조판서에 이르렀다.
일찍이 포은 정몽주 선생을 사사하여 성리학을 들으시고 드디어 재상의 지위에 이르러 지치를 도와서 성취하게 한즉, 마땅히 문장과사업이 청사에 혁요함이 있었으나 여러번 호검을 지나서 문헌이 탕잔하여 생졸과 배위를 모두 고증할 수 없고, 또 묘소가 김해 거절리에 있다 하나 알 수 없으니 후손 등이 심히 개탄하여 차원군 동면 금호재의 옆에 설단(設壇)하고 비를 세워 장차 세일제를 행사니 대개 공의 자와 손과 증손의 누세 분영이 모두 금동의 산록에 있고 재실도 제숙의 곳이라. 이 단을 이 곳에 설치한 것은 실로 정으로 화합한 것이라.
20세 후손 정환이 나에게 와서 말씀하기를 이 일은 실로 우리 증왕고 휘 종내공이 일생을 경영하였다. 끝내 이루지 못한 것이라. 지금은 종론이 함께 하여 마침 성사가 되니 일가분들의 뜻에 따라 원하는 것이 마치게 되었고, 또 증왕고의 하늘에 계신 혼령도 위로될 것이다. 우리 문장께서 서문으로 후손에게 전하기를 청하였느니라. 이 역사에 큰 돈을 낸 분은 후손 노징이요, 시종 간사를 맡은 분은 동섭과 동설이라. 공의 후를 안찰하건대 사(四)자가 있으니 장자는 수광이니 호는 환성헌이라 문과로 수원부사를 역임하시며, 직간과 염백으로 저명하고 예문관(藝文館) 춘추관(春秋館)으로 양사(兩司) 헌납(獻納)에 이르고 후에 특별히 한림원 태학사를 내려도 나아가지 않으시고 창원의 산남에 사시었다. 숙광은 정언이요, 계광은 목사요, 익광은 군수이시었다.
수광의 남석공은 진원현감이요, 석근은 참봉이고, 숙광으 남 석하는 진사요, 계광의 남 석징은 봉사요, 익광의 남은 석형이요. 석보는 감무요, 석현은 현감이라. 이후로는 자손이 번성하여 가히 헤어리지 못하노라. 명하여 말하기를 신성의 후예가 그 화려함이 불억이라. 근원이 멀고 흐름이 길어 팔(八)역에 편만하네. 거룩하도다.
판서공은 시대에 맞게 나셨도다. 몸을 조정에 두어 문장의 큰 복이라. 연원이 있으니 늙은이의 스승이라, 아깝도다. 거룩한 자취가 탕잔하여 남음이 없어라. 하물며 엄한 위엄은 눈으로 볼 수 없도다.
우모하는 곳이 없어 후손에게 한을 주었음이라. 지금에야 설단(設壇)을 생각하며 비(碑)를 세웠구나. 일기가 유통하여 신이 거기에 임하리라. 해마다 제수를 올려 예로서 의를 일으김이라.
삼가 제사를 끝없이 하여 그 천년을 이으리라.
무신(戊申) 입춘절(立春節)
종후생(宗後生) 종하(鍾河) 찬(撰)


